궁예가 지지세력을 결집하기위해 자주 다녀갔기에 왕방산이라 불러

포천의 많은 산 중에서도 왕방산은 포천시의 진산(鎭山)으로 불리운다. 왕방산으로 불리운 유래를 찾아보니 정말 많은 전설을 가지고 있다. 

왕방산으로 불리우게 된 유래 중에 가장 오래된 유래는 신라 말(872년) 헌강왕이 도선국사가 창건하였다는 설이 있는 지금의 보덕사를 친히 방문했다 하여 산 이름을 왕방산이라 하고 절 이름을 왕방사라 부르게 됐다고 전해지고 있다. 

신라 872년 무렵이었다.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이산에 머물고 있을때 헌강왕이 친히 행차라여 도선을 격려하였다 해서 왕방산이라 했다. 

함흥차사(咸興差使)와 연관된 전설도 있다. 태조 이성계가 한양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왕자들의 골육상쟁 소식을 듣고 마음이 아파 왕방사(지금의 왕산사)에 며칠동안 머물렀다 해서 왕방산이라 했다는 이야기이다.
 
당시 왕방사 아래에서 왕을 경호하던 병사들이 야영했다는 마을을 호병골(護兵洞)이라 불렀으며 왕방산과 서북능선상의 주봉인 국사봉의 계곡아래 깊이을 마을에서는 국사(國師),도원수(都元帥),정승들이 모여 국사를 논의했다고 한다.

왕방사는 봉선사본말사약지에 의하면 877년 신라 헌강왕 3년 도선국사가 창건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창건과 함께 왕이 친히 방문하여 격려해 주었으므로 산 이름을 왕방산(王方山)이라 하고 절이름은 왕산사(王山寺)라 했다고 이 약지는 전하고 있다. 

헌강왕이 도선국사의 높은 덕을 흠모해 자주 궁으로 모셨던 역사적 사실을 고려해 볼때 이같은 약지는 상당한 설득력을 갖고 있다.

그러나 이 기록은 신라 말 극심한 내란이 전개되고 있어 왕이 극도로 혼란했던 변경의 포천을 방문했다는 것이 허구일 가능성이 많다고 보는 견해도 만만치 않다. 

그보다는 철원을 도읍으로 삼고 후고구려를 세운 궁예가 이 지역의 지지세력을 위무하기 위해 자주 다녀갔기에 궁예가 왔던 산이란 뜻으로 왕방산이라 불렸을 것이란 견해도 있는데 이 전설이 가장 타당할 것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다. 

또다른 전설로는 고려말에 목은 이색이 속세를 떠나 왕방산에 들어와 은신해 있었기에 고려왕이 항상 이색을 생각하며 이 산을 멀리서 바라보았다고 하여 왕망산으로 불리다가 후에 왕방산으로 변했다는 기록도 있다고 한다.

조선의 태조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이 산에서 무예를 익히고 사냥을 했으며, 왕위에 오른 후에도 단오와 추석에 강무(임금이 참관하는 무예시범)를 했다 하여 왕방산이라 부르게 됐다고 한다. 

태조 이성계가 왕위를 아들에게 물려주고 함흥에 살다가 한양으로 돌아오던 중 왕자의 난 소식을 듣고 비통한 마음을 달래고자 이 산을 찾았다는 다른 유래도 전해진다.

왕방산 주변에 이와 연관된 지명으로 왕숙천, 팔야리(이성계가 한양에 들어가기 전에 여덟 밤을 지낸 마을) 등이 남아 있다.

이 모든 전설들이 사실 여부를 떠나 산 높고 골 깊은 왕방산의 신령스러움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왕방산 주변에는 선단(仙壇)과 어룡(魚龍)이라는 지명이 있으니, 마을 뒤편의 왕방산에 큰 바위가 있어 주민들이 이곳에 제단을 놓고 제사를 지내면 신선이 내려온다고 믿어 선단(仙壇)이라 불렀다는 설이 있는 곳이다. 어룡(魚龍)은 어변성룡(魚變成龍)의 고사에서 나온 말로, 물고기가 변하여 용이 되었다는 것이다.

고려말 시중을 지낸 성여완이 난세를 피해 이곳 왕방산 아래에 우거(寓居)하고 있을 때 이성계가 이 고개를 넘어 예를 갖추어 찾아와서 조정에 입조할 것을 권유했던 고개라 하여 문례현(問禮峴)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무럭고개는 문례현의 와전이라는 전설이다.

또 일설엔 낙향을 하던 장독곡 대감이란 분이 이 고개를 넘다가 왕방산의 웅자하고 장엄한 모습을 보며 “저 산 이름이 무엇인고? 이 고개 이름이 무슨 고개인고?”하면서 수려하고 장엄한 산천 경개에 취해 묻고 또 물었다고 문래현(問來峴)이라 불렀다고 한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에 보면 ‘살아서는 포천가야 양반이고, 죽어서는 장단가야 양반’이란 말이 있어 포천에는 빼어난 인물들의 흔적이 많다고 한다. 사육신의 한 사람인 유응부와 영의정을 지낸 유순, 양사헌, 이덕형, 대한제국 말의 최익현, 이항복이 그들이라 한다.. 이렇듯 포천 땅은 복 받은 곳이고, 산 높고 골 깊은 왕방산은 예로부터 나라의 태평을 기원하던 명산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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