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녀가 곰으로 변하여 사슴을 잡는 것이 아닌가. 그후 처녀는~

웅진동(熊津東)과 용당(龍塘)이라는 마을이 있다. 공주는 본래 웅천(熊川)이었는데 백제가 이곳으로 도읍을 옮긴 뒤에는 웅진이라 하였고, 백제가 망한 뒤에는 당나라에서 이곳에 웅진도독부를 두었다.

신라가 당을 몰아낸 후에는 웅천주로 고쳤다가 경덕왕 때 웅주라고 하였으며 고려 태조 때 공주로 고쳤다. 평소 군비를 게을리하였던 백제 개로왕이 군사 3만 명을 이끌고 475년 9월 한성(漢城:서울)을 공격한 고구려 장수왕한테 피살되자, 그의 아들 문주왕은 즉위 후 곧 도읍을 웅진으로 옮겼다. 
성왕이 다시 도읍을 소부리(所夫里:부여)로 옮길 때까지 웅진은 63년간 백제의 수도였다. 웅진은 그후 백제 마지막 임금인 의자왕이 왕성인 부여를 버리고 이곳에 있다가 마침내 패망하였던 유서 깊은 곳이다. 웅진이라는 이름은 금강가에 있는 나루터인 '고마나루(곰나루)' 즉, 곰 웅(熊), 나루 진(津)의 뜻을 취한 것으로 '구마나리'. '고미나루' 등의 어원도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이 곰나루에 관하여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다.

옛날 이곳에 살던 한 사내가 하루는 인근에 있는 연미산에 놀러 갔다가 길을 잃고 배가 고파서 바위 굴 속에 쉬고 있던 중 한 처녀를 만났다.

사내는 처녀와 굴 속에서 하룻밤을 지내는 동안 부부의 연을 맺고 며칠을 보내게 되었다. 그러나 매일 굴을 나갔다가 음식을 가져오는 처녀의 정체가 의심스러워 뒤를 쫓아가 보니 처녀가 곰으로 변하여 사슴을 잡는 것이 아닌가. 그후 처녀는 사내가 자신의 정체를 눈치챈 것을 알고 사내를 바위 굴 속에 가두어 놓았으며 사내는 암곰과 사는 동안 자식까지 둘을 낳았다.

어느 날 암곰이 바위로 굴을 막지 않고 나간 틈에 사내는 도망을 나와 금강을 헤엄쳐 건넜다. 

뒤늦게 이를 알고 쫓아 나온 암곰이 멀리서 자식을 들어 보이며 마음을 돌리도록 호소하였지만 이 사내는 매정하게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기 집으로 돌아왔다. 

이에 암곰은 어린 자식들을 안고 금강에 뛰어들어 자살하고 말았는데, 그후부터 금강을 건너는 나룻배가 풍랑에 뒤집히는 일이 많아 나루 옆에 사당을 짓고 곰의 넋을 위로했다고 한다. 곰내.웅진 또는 곰나루라는 이름은 여기서 비롯된 것이라고 하며, 1972년 이 나루에서 돌로 새긴 곰상을 발견하고 그 자리에 곰사당인 웅신당(熊神堂)을 지어 모시고 있다.

고려 초부터 부르기 시작한 공주라는 이름은 공주의 진산인 공산(公山)이 '공(公)'의 글자와 같이 생겼기 때문이라고도 하고, <곰주>가 음이 비슷한 <공주>로 바뀐 것으로 풀이하기도 한다.

또 용당은 문주왕이 이곳에 도읍을 옮기자 금강가에 용왕제를 지내는 용제당(龍祭堂)을 둔 데서 생긴 이름이라고 한다. 그리고 지금도 웅진동의 중심이 되는 마을을 <소정(小亭)>이라 하고, 그 앞들을 '소 정이 벌'이라 부르는데, 이곳은 당나라 소정방의 군대가 주둔했던 곳이라고 하며, 이 벌판에 지금도 ' 웅진도독부 터' 또는 '소정방장대 터' 등의 욕된 발자국 흔적이 이름으로 남아 있다.

공주 시내 웅진동 곰사당(熊祠堂) 자리에서 수습(收拾)된 것이다. 즉 무령왕릉 맞은편 남쪽 구릉 중복의 경사면에서 출토된 것인데 1972년에 공주박물관에 수장(收藏)하게 된 것이다. 전체적으로 각 부가 마멸이 심한 편이어서 선명하지 않은데 본래부터 강한 선으로 조각했던 것은 아닌 것 같다. 목을 움추리고 머리를 약간 위로 향하였는데 입은 다물고 양쪽 눈은 뜨고 있으며 양쪽 귀는 뒤로 붙어 있다. 앞다리를 세우고 뒷다리는 구부려서 앉자 있는데 발톱 등의 조각은 선명하지 않다. 석질(石質) 자체에서 오는 감각도 있겠으나 오래된 탓인지 일견(一見)하여 동물상임을 알겠으나 곰이라는 느낌은 쉽게 오지 않는다. 곰나루와 가까운 이 지역을 예로부터 곰과 관련된 지명이나 전설이 많이 남아 있고 오늘날에 이르러서도 '곰'이 공주의 상징과도 같이 전해오고 있다.

이 '돌곰상'이 출토된 곳이 바로 웅진동의 곰사당 자리인 것으로 보아 이 '곰상'을 사당에 안치하여 제사를 지내며 신앙의 대상으로 삼았던 것이 아닌가 한다.

우성면 동곡리에 조왕동이라는 마을이 있으며 인근 목천리에는 소우물, 우정(牛井) 또는 우천(牛泉)이라는 우물이 있는데 이곳은 인조 임금의 피난에 얽힌 이야기가 전해진다. 우성면은 본래 우정면(牛井面)이었던 곳이다.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인조는 한양을 버리고 남쪽으로 피난하여 공주의 쌍수산성으로 들어갔다. 임금의 일행이 이곳을 지날 때 인조가 타고 가던 소가 몹시 기갈이 심하여 헉헉거리므로 이 우물에서 물을 먹였다. 그때부터 이 우물을 '소우물'이라 하여 유명해지게 되었고, 면이름도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한편 쌍수산성에 피신한 인조 일행은 식량이 떨어져 몹시 곤란하게 되었는데, 이 마을에 사는 관류당 (觀流堂) 노숙(盧潚)이 쌀 300석과 닭 수백 마리를 바쳐 급한 화를 면하게 되었다. 이에 임금이 노숙 에게 소원을 물으니 "묵정밭의 세금을 덜어 민폐를 적게하여 주소서"하고 아뢰니 "너는 왕을 돕고 농민을 위하는 사람이구나"고 칭찬하고 친히 마을 이름을 조왕동(助王洞)이라 부르게 하였다고 한다. 아마도 역대의 많은 임금 중에서 인조만큼 여러 땅이름에 숱한 일화를 남긴 왕도 드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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