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이 양팔 걷고 밀어붙이니 5·18 명예 회복도 되는 듯싶다. 광주하고는 아무런 연고가 없지만, 필자의 아버님 기일이 음력 5월 18일이라서 그날은 기억한다. 정말 덥다. 한낮에는 와이셔츠 긴소매를 대통령처럼 걷었다. 필자는 신혼 초에 이름의 끝 자만 따서 아내를 불렀다. 아내는 나이가 나보다 어렸기에 어쩔 수 없이 필자를 ‘오빠’라 불러야 했다. 보다 못한 아버님께서 너희도 부부가 됐으니 오늘부터는 ‘여보 당신’으로 고치라는 엄명을 내렸다.

필자가 아버님과 지낸 27년 동안, 어머님과 부부싸움 하시는 걸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어릴 때는 아버님이 연하이시니 당연하다 생각했다. 필자가 얼굴에 여드름이 생긴 고등학교 때도 마찬가지였다. 우리 앞에서 대화하시면서 서로 반말을 안 하셨다. 이따금 다른 집안일로 다툼이 예상될 때면 어머님께서는 조용히 텃밭 두엄자리 옆으로 아버님 손을 끌고 데려가셨다. 그곳에서 나누던(혹은 다투던) 대화를 다 옮길 수야 없지만, 어머님께서 ‘당신! 당신!’ 하시면서 무엇인가 조곤조곤 따지시면 아버님은 ‘여보! 알았어, 알았다고요’하시고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방안으로 들어오시어 우리 앞에서 수저를 드셨다.

이처럼 남자가 여자를 부를 때 같을 여(如) 보배 보(寶) 여보(如寶)라 한다. 아내는 보배와 같이 소중한 사람임을 필자는 그때 이미 알았다. 물론 ‘여기 보오’의 준말이란 설도 있기는 하지만 설득력이 떨어진다. 반대로 여자가 남자를 부를 때 당신(當身)은 내 몸과 같다는 뜻이란다. 물론 지역이나 사람 그리고 사정에 따라 달리 부르기도 한다지만, 우리 집안처럼 ‘여보와 당신’ 두 글자라면 남북통일도 가능한 좋은 처방이니 삼천리 강토에 두루두루 강권하고 싶다. 

더 먼 옛날에는 아내가 남편을 ‘서방님, ‘낭군, 나리’로 불렀단다. 남편은 아내를 ‘각시, 마님, 부인’이라고 했고, 부부가 함께 쓰던 ‘자네, 임자’가 있다. 그 외에도 남편을 ‘영감, 그이, 저이, 그분, 집주인, 신랑, 아기 아빠’, 아내는 ’내자, 이녁, 집사람, 아기 엄마‘ 등 호칭이야 이루 헤아릴 수 없다. 여권이 신장한 요즘에는 부부끼리도 ‘×× 씨, 자기’라면서 절대로 하대하지 않는다. 될 수 있으면 ‘×× 선생님, ×× 대표님, ×× 박사님’ 등 사회적 지위를 앞세워 서로 격려한다.

신세대에 속하는 후배들은 아내가 자신을 애칭으로 ‘어린 왕자, 물 찬 돼지, 강쇠’라 부른다고 자랑한다. 후배도 제수씨가 육아 등으로 집에서 가사에 종사하면 ‘백조 혹은 달님’, 맞벌이하면 흑자가 나 좋기는 하지만 서로 피곤해서 ‘흑조 혹은 고니’라고 한단다. 필자처럼 기구한 팔자인 글로 밥 먹는 기자는 글자를 뒤집어 봤자 별 볼 일 없이 ‘자기’뿐이다. 물론 또 다른 호칭도 있다. 그걸 다 열거하자니 필자까지 천박해 보일 것 같아 각설하고,
 
연세가 지긋한 할아버지는 밑져 봤자 본전이라며 용감하게 ‘마누라’, 치아가 빠져 할머니가 되면 남편을 ‘영감’으로 자연스럽게 부른다. 그런데 알고 보면 조상의 지혜가 돋보인다. ‘마누라’라는 말은 본래 옛날 궁중에서 상궁이나 후궁과 왕비를 부르던 삼인칭 극 존칭어이고, ‘영감’은 조선 시대에 3품 이상의 벼슬아치이며, 현대에 와서도 사법고시를 패스한 검사쯤은 돼야 들을 수 있는 귀한 호칭이니 이보다 더 기분이 좋을 순 없다. 그래서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면 ‘헤헤 호호’하시며 얼굴에 주름살을 더 늘리시나 보다. 
 
어제 5월 21일 일요일은 ‘부부의 날’이었다. 두 사람이 하나가 되었던 중한 날을 엄숙하게 기념해야 하는 날이다. 이번 5월에는 때아닌 대통령 선거가 있었고, 기념일과 행사가 하루 걸려 이어져서 ‘부부의 날’을 깜박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늦었다고 생각 마시고 오늘이라도 퇴근길에 평소 좋아하던 금빛 장미 두 송이만 챙기시라. 주방에서 가족을 위해 맛난 음식 준비에 여념 없는 아내에게 ‘여보!’라고 부르면서 꽃을 전달해보시라. 아내는 ‘당신! 웬일이야!’ 하면서 애들처럼 좋아할 것이다. 분명한 것은 잠깐만 더 기다리라더니 고봉밥 위로 달걀 후라이가 올라오고 몇 달간 냄새도 못 맡았을 고등어구이까지도 식탁 가운데에 척 자리 잡을 것이다. 그리하여 필자는 부부간 호칭으로 ‘여보와 당신’을 강력추천하는 바이다.

“여보! 나 잘 썼지?”
“당신! 참 멋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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