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황대에 올라 하늘문 바위서 사랑의 열병을 이기지 못해 그만

가락국 제9대 임금인 겸지왕 시절 봉황대 아래에 사는 출정승과 황정승은 절친하여 자식이 태어나면 서로 약혼을 시키기로 약속을 했다.

그러나 마음이 변한 출정승은 황정승에게 아들을 낳았다고 거짓말을 해 이전의 약혼을 깨었다.

출여의는 남장을 한 채로 황세와는 친구사이가 되어 봉황대에서 어울려 놀았다. 하루는 황세가 여의를 부추겨 봉황대 정상에 있는 ‘개라암’에 올라가서 ‘오줌멀리누기 시합’을 하자고 졸랐다.

난처해진 여의낭자는 기지를 발휘하여 바위 뒤에 있는 삼대를 꺾어 오줌을 눔으로써 위기를 넘겼다. 그 후 사람들은 이 바위를 오줌바위 또는 황세바위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후에도 황세는 여의를 여자라고 의심하게 됐고 여름날 황세는 여의에게 봉황대 옆으로 흐르는 거북내에서 목욕을 같이 하자고 말했다.

더 이상 여자란 사실을 숨길 수가 없게 되어 여의낭자는 편지를 써서 물에 띄워 보내 황세에게 사실을 고백하게 되었다. 이로써 황세와 여의의 사랑은 시작되었다.

그리고 양가부모도 그들의 결혼을 인정했다. 몇년 뒤 신라군이 가락국을 침범하는 일이 발생하고 황세장군는 전쟁터에 나가게 되어 신라군을 무찔러 큰 공을 세우고 돌아오게 된다.

이에 겸지왕은 황세에게 ‘하늘장수’라는 칭호를 제수하고 외동딸인 유민공주와 결혼할 것을 명했다.

황세장군은 명령을 거역할 수가 없는 상황이 되었고 결국 유민공주와 결혼하고 만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여의는 외로이 살며 다른 남자와 혼인하라는 아버지의 말씀을 마다하고 황세와 놀던 봉황대에 올라 하늘문 바위에서 사랑의 열병을 이기지 못해 죽고 말았다.
 
여의의 죽음을 알게 된 황세 또한 마음의 병을 얻어 죽고 말았는데 유민공주 역시 출가하여 산으로 들어가 두 사람의 명복을 빌었다고 전해진다. 봉황대 맞은편 임호산이 바로 그 산인데 공주의 이름을 따서 ‘유민산’이라고도 불리우는 것은 이 때 이후부터이다.

성사람들은 황세와 여의낭자를 위로하기 위해 그들이 놀던 개라암에 작은 바위를 얹고 서남쪽의 것은 ‘황세돌’이라 하고, 동남쪽의 것을 ‘여의돌’이라 불렀다고 전한다.
 
한편 초선대 마애불은 김해시청 앞 국도 14호선을 따라 부산으로 달리다 5분여 거리에서 신어천을 만나고 신어천을 지나 오른쪽에 짙푸른 구릉의 푸른숲이 있다.

김해시 안동 685-1번지가 주소인 초선대(招仙臺)로 경남도유형 문화재 제78호로 74년 2월 16일 지정된 마애석불(磨崖石佛)을 만날 수 있다.

초현대(招賢臺)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이는 가락국 2대 거등왕(居登王)이 칠점산(현재의 강서구 대저동)에 살고 있던 담시선인을 초청했다는 구전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선인은 금(琴)을 안고 배를 타고 와서 거등왕과 바둑도 두고 노래하며 즐겁게 놀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 곳에는 당시의 만남을 전하듯 선인과 바둑을 둘 때 거등왕이 앉았다는 연화석(蓮花石)이 남아있다. 초선대의 서쪽에 위치해 있는 거대한 자연바위에 너비 3cm정도의 굵은 선으로 음각된 마애석불좌상이 이곳의 주인으로 초선대의 신비로움과 아름다움을 높여주고 있다.

연화대 위에 결가부좌(結伽趺座)하고 있으며 불상의 뒤쪽에는 둥근 모양으로 음각된 두광(頭光)과 신광(身光)이 있고 옷자락이 무릎까지 덮고 있다.

불상 연구가들이 고려시대의 불상으로 아미타여래로 보고 있으며 높이 5.1m 몸통 높이 4.3cm, 머리높이 1.1, 어깨폭 2.5cm, 대좌높이 0.8cm 대좌폭 4.7m로 김해지방에서 가장 큰 불상이자 대표로 꼽히고 있다.

이 불상에 대해 수로왕의 왕비인 허비를 수행해 와서 이 나라 최초로 불교를 전파한 허비의 형제 장유화성(허보옥)의 상이라고 보는 이가 있다.

이는 불상이 서쪽의 고국(인도 아유타국)을 향해 있다고 보는 이가 있기 때문이나 향인들의 구전일 뿐이다. 이곳 주위가 도시계획으로 개발이 되고 있어 초선대의 모습은 더욱 푸르고 아름답게 돋보이고 있어 시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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