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0년 동안 전남 완도를 지켜오신 남해의 주신 宋徵 대장군

완도 주민들과 조선시대 추모시에 의하면 송징은 대장군 이었다. 그런데, 위 분에 대한 기록이 없다보니, 정확히 대장군 인지, 아니면  지방관 인지, 더욱이 어느 시대에 살다가신 분인지 조차 모른다.

즉, 오랫 동안 구전으로 그 분의 존함과 업적만이 전래됐을 뿐이다.그렇다면, 정년이 장보고의 친구 였으니, 과연 송징 대장군도 장보고의 친구 였을까?. 그렇지 않다.

조선 중엽 (1564-1643년)을 살다간 문관이 한 분 있다. 위 분이 정철과 친분이 있었다고 하니, 아마도 충숙공 諱 영구 조부님과 같은 시대에 활동하신 분으로 보인다.그리고 위 분은 본관이 신평송씨 이시다.그렇다면 신평송씨 이 분이 과연 완도의 주신 이었을까? 

한편 우리 진천송씨 족보에도 宋徵 이라는 분이 계신다.송정공 증손자 목사공 諱 징이 있다.

생원공 諱 옥 조부가 송정공파 도사공 익산문중의 낙향조 이신데,생원공의 친형님 되시는 분이다.

위 목사공은 진천송씨 송정공파에서 2번째로 대과에 급제하신 분인데, 조선실록에도 그 행적이 잠시 보이며 여주목사를 지낸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위 분은 아들이 없어 그 대가 끊겼다.

그렇다면 송정공의 증손자 위 분이 과연 완도의 주신 이었을까?. 그러나 모두 아니다.정확한 것은 아니지만, 완도읍지에 송징은 고려 말 대장군 이라고 소개되어 있다고 한다. 

고려 말 대장군 이라고 하면, 혹시 송문주 장군 처럼 원나라 몽골에 대항하신 분 아닌가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런데, 고려 말 공민왕 시절에 이미 원나라는 쇠퇴하여 징기스칸의 후예들은 다시 몽골 초원으로 돌아가 내몽골 지역에서 거주하게 되는 이 무렵 고려 공민왕은 원에 빼앗긴 고려의 주권과 영토를 회복하고자, 최영, 이성계 장군들로 하여금, 자비령 (철령) 이북을 점령케 하는 등 북진정책에 주력했다.

그러다 보니 당연히 몽골과 거리가 먼 남해안 일대는 좀 등안시 했는데, 이때 왜구 무리가 자주 남해안과 동해안 일대를 노략질해 고려 조정에서는 남해안의 왜구를 대대적으로 토벌하고 방어할 필요가 있었다. 

아마도, 송징 대장군은 이 무렵 남해안 수문장으로, 청해 (전남 완도)에 파견되어 그 지역 주민과 함께 왜구를 토벌하고, 선정을 베풀어 그 지역 주민들로 부터 칭송을 받지 않았나 생각된다.

그리고 그 공로로 오랫동안 완도 지역 주민들 사이에 신으로 추앙되어 제향을 모셨을 것이다.  얼마전 어느 대학 교수가 청해진 (완도) 주신 宋徵 장군을 고찰하기 위해, 고려사를 찾아 보았는데, 고려사에 그 행적이 보이지 않아, 전국 각 송씨 집안의 족보를 뒤졌다고 한다.

그런데, 진천송씨 족보에 고려 말 공민왕 시절에 살다가신 府使 宋徵을 발견한 것이다. 이로써 그 교수는 혹시 이분이 완도의 주신이 아닌가 했는데, 위 분의 대가 끊어져, 그 내력의 전함이 없고, 더욱이 진천송씨 족보도 이분에 대한 기록이 빈약하다 보니, 완도의 주신을 연구한 대학교수도 진천송씨 부사 송징이 아닐까 하는데, 정확하지는 않다라고 결론을 맺을 수 밖에 없었다.
 
진천백 諱 仁 시조님의 5代孫 (래손) 찬성사공 諱 지백 조부는 4명의 아들을 두었는데,徵, 소(王+召), 琳, 무 (王+懋) 이시다.
 
평리공 諱 소 조부께서 전서공, 낭장공, 안성공 3명의 아들을 두시고,서령공 諱 림 조부께서 송정공 외아들을 두셨는데, 송정공께서 고려 우왕 때 과거에 급제한 사실이 고려문과방목에 기록되어 있으며,우왕의 선왕이 공민왕 이고,부사공 諱 징은 송정공의 백부 되시니, 진천송씨 족보의 부사공은 공민왕 시절에 활동하신 분으로,완도읍지에 보이는 고려말 대장군과 일치한다.

한편 송정공은 족보와 조선실록에 존함이 愚 (어리다 우) 인데, 고려 문과 방목에는 遇 (만날 우)로 되어있다. 그래서 서로 다른 사람처럼 보일 수 있으나, 고려문과 방목에 松停이라 쓰고, 그 아래 鎭州人 (본관 진천)이라 기록하여,위 분이 진천송씨 송정공 조부라는 것을 알수 있었다.

그런데, 송정공이 고려 우왕 3년에 급제를 하였다고 하니, 큰 아버지 되시는 송징 장군은 고려 말 사람이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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