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산은 운문면 순지리에 있으며 높이 약 700m의 험준한 산으로 임진왜란 때에는 청도 의병들이 왜적과 싸웠던 유서 깊은 곳이다.
이 산을 호산이라 부르게 된 것은 호산 바로 아래에  단지 9집이 오손도손 사이좋게 살고 있었다 한다.

그 가운데 한집에 늙은 내외가 무남독녀 외동딸을 데리고 외롭게 살고 있었다. 아버지는 매일 산에 가서 나무를 하고 어머니는 나물을 뜯으면서 그날 그 날을 어렵게 살림을 꾸려가고 있었다. 

저녁이 되어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에 들어오면 딸은 저녁을 지어놓고 밖에 나와 부모님을 마중해 드리곤 하였다.
그러던 어느 해 여름철 하루는 늙은 부모님이 하루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보니 이상하게도 딸이 그 날은 마중을 나오지 않으니 궁금도 하거니와 걱정이 되어 급히 집으로 돌아왔다.

 온 집안을 샅샅이 찾아보아도 딸의 행방은 알 수 없었고, 마을 사람들은 틀림없이 산짐승에게 물려갔을 것이라고 했다. 늙은 부모는 딸을 애타게 찾았으나 나타나지 않으니 매일같이 딸의 생각으로 눈물로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이듬해 여름철 어느 날 딸을 기다리고 있는 늙은 내외에게 이웃집 청년 한 사람이 땀을 흘리며 뛰어 오더니 1여 년전에 없어진 후 소식이 없던 딸을 산꼭대기에서 보았다고 했다.

 이 말을 들은 처녀의 늙은 부모가 깜짝 놀라 청년에게 자세히 물으니 "오늘 산에서 나무를 하려고 산꼭대기로 올라가는 참인데 바로 그 때 지금껏 없어졌다고 생각했는 처녀가 누런 호랑이와 같이 있었는데 놀랍고도 이상한 일은 호랑이는 짐승 고기를 뜯어먹고, 처녀는 곁에서 불을 피워 고기를 굽어 호랑이에게 먹이고 있더라" 는 것이었다. 

부모들은 뜻밖의 소식에 놀라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으나 동네 사람들은 전혀 믿으려 들지 않았다.처녀의 부모들은 동네 사람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청년이 말하던 산꼭대기로 올라가 보았다.

과연 그 곳에는 딸이 소복단장을 하고 누런 호랑이와 함께 방금 잡아 온 듯한 산토끼를 다정하게 구워먹고 있었다. 늙은 부모는 호랑이가 무서운 줄도 모르고 딸에게 달려가서 얼싸안고 울었다.

딸은 부모님을 만나기가 미안한 듯한 기색이었으나 호랑이와 서로 무슨 말을 주고받고는 부모에게 말하기를"아버님 어머님에게 불효가 막심합니다만, 저는 지금 호랑이를 지극히 사랑하고 있으니 이대로 저는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아버님, 어머님은 내려가셔서 저를 잊고 사시기 바랍니다." 고 하였다. 늙은 부모는 딸을 달래며 사정을 하였으나 딸은 끝끝내 집으로 내려갈 수 없다고 하였다. 딸의 뜻을 돌릴 수 없음을 알자 부모들은 딸을 산에 남겨두고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늙은 부모는 딸의 생각으로 눈물로 나날을 보내기 수년이 지났다. 그러던 어느 날 밝은 밤이었다. 갑자기 바람소리와 함께 방문이 열리더니 마당 한가운데 난데없는 커다란 호랑이가 한 마리 앉아 있었다.

늙은 부모는 갑자기 당하는 일이라 정신이 혼비백산하여 어쩔 줄을 몰라했다. 그러자. 호랑이는 내외가 정신없이 앉아 있는 방문 앞에 오더니 조용히 타라는 시늉을 하였다. 기이하게 생각한 늙은 내외가 호랑이 등에 올라타자 눈 깜짝할 순간에 쏜살같이 산꼭대기로 올라갔다.그곳에는 그동안 애타게 그리던 딸이 이미 중년이 되어 소복을 입은 채로 죽어 있었다.

늙은 부모는 딸의 시신을 끌어안고 목이 메이게 울다가 보니, 딸의 시신 옆에는 딸의 유서가 남겨져 있었다. 유서에는 불효한 자식을 용서해 달라는 말과 함께 자기는 그동안 호랑이와의 생활이 행복했으니 자기의 시체는 호랑이와 같이 살아온 이 산꼭대기에 묻어 달라는 내용이었다. 

늙은 내외는 딸의 유언대로 동네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호랑이와 같이 지내던 산꼭대기 양지 바른 곳에 고이 묻어 주었다.이런 애절한 일이 있은 후부터 이 산을 호산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지금도 산꼭대기에는 조그만 무덤이 하나 남아 있다. 그리고 딸이 부모들과 함께 살았던 동네를 범골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지금도 순지리를 범골이라 부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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