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규야! 이리 와 사진 찍어.”

필자가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시절에는 사진기가 그리 흔하지 않았다. 몇몇을 빼고는 사진관에 출사를 부탁해 찍을 수 있었다. 당시 유도부 주장이던 상열이가 마지막으로 교정을 배회하던 나를 불렀다. 체구가 남달리 컸던 그는 대학 졸업 후 뮤지컬 배우가 됐다는 소식은 제대 후 직장에 나갈 때 들은 바 있다. 아직도 국립극단에서 정년과 관계없이 현역으로 활동하는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금수저 출신이다. 이따금 연예 프로그램에도 출연한다. 흰 머리카락을 파마한 모습이 아주 곱게 늙었다. 한일사진관 아저씨도 얼른 오라고 재촉한다.

“돈 없어요.”
“넌, 공짜로 해 줄게. 아까 강당에서도 몇 방 찍었다.”

겨울방학이 끝난 2월은 다른 달에 비해 2∼3일 짧아도 ‘봄’을 맞이할 채비로 분주해진다. 사람마다 계절의 봄은 오지만 똑같은 봄이 아니다. 요즘 페이스북이나 카카오톡에 뜨는 졸업사진 풍경들…. ‘축하해요, 좋아요’만 눌러줘도 여간 바쁘지 않다. 어느새 필자의 후배들도 슬하 자녀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해 대학으로 진학하는 중이다.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금수저 집안이 아니라면 두 내외가 뼈 빠지게 벌어야 가까스로 그 뒷바라지가 가능하다.

필자도 고등학교 졸업식은 이맘때인 2월 중순께 했다. 아버님께서 급작스레 쓰러지시는 바람에 아예 대학진학을 포기하고 공군기술병 자원입대 날짜까지 받아놓은 상태였다. (제대 후 대기업에 입사해 주경야독으로 국문학사는 취득했다) 필자의 재능을 아끼던 문예반 선생님께서는 졸업식 날 답사를 준비하라고 하셨다. 몇 날 며칠 동안 도서관에서 이 책 저 책을 뒤적여 좋은 단어는 깡그리 모아 제법 긴 장시 1편을 가까스로 탈고했다.

식순에 의해 졸업장을 받고, 내빈 축사와 교장 선생님 훈화가 끝난 후 재학생 대표가 울먹이며 송사를 낭독했다. 이어 필자가 답사하기 위해 연단 위로 올라섰다. 수백 개의 눈동자가 일제히 필자에게 쏠렸다. 이미 코를 훌쩍이며 울고 있는 모습들도 간간이 보인다. 필자는 모조지 8장을 세로로 길게 붙여 두루마리 형태로 만든 답사를 준비했다. ‘동포여! 일어나라. 손잡고 백두산에 태극기 날리자’로 시작해 서서히 절정을 향해 치닫기 시작했다. 필자의 손도 약간은 떨렸고, 닭살처럼 팔뚝에 소름이 오종종하게 돋았다. 드디어 마지막 연, 단전에 잔뜩 힘을 주고 강당의 천정이 들썩거리도록 목구멍에서 피를 토하듯 울부짖었다.

“동포여, 일어나라, 똥 퍼요, 똥 퍼요!”

‘동포여’에 너무 힘이 들어가는 바람에 ‘똥 퍼요’가 돼버렸다. 물론 필자의 의도적인 연출이었지만, 엄숙했던 강당이 배꼽을 잡는 아수라장으로 돌변했다. 교장 선생님의 얼굴은 험하게 일그러졌다. 그때만 해도 반공을 국시로 여기던 엄격한 시절이었다. 문예반 선생님께서는 날렵하게 단상으로 뛰어 올라와 교장 선생님과 귀엣말을 나누셨다. 그때야 교장 선생님과 내빈들도 발을 구르며 함께 웃어 재꼈다. 필자는 침착하게 두루마리 답사를 돌돌 말아 교장 선생님께 공손하게 구십 도 각도로 절하고 드렸다. 교장 선생님께서는 필자의 이마에 꿀밤을 한 방 먹이고는 힘껏 끌어안아 주셨다.

역시 유행은 돌고 돈다. 그 당시 유행했던 노래가 ‘될 대로 되라’하던 ‘캐 세라 세라(Que sera sera)였다. 누구도 자신의 미래는 알 수 없다. 무엇이든 될 것은 결국 이뤄지고 안 되는 것은 아무리 애를 써도 안 되게 마련이다. 그러하니 내일 일은 너무 걱정하지 말 일이다. 인용되건 기각되건 때가 되면 저절로 밝혀진다. 대기업 수장이 포승줄에 묶이고, 저쪽에선 이복형제라지만 최고통수권자의 형도 타국의 낯선 길바닥에서 객사하는 무서운 세상이다. 어김없이 오는 봄이지만, 누구에게나 화창한 봄날은 아니다. 사람마다 엮인 운명의 실타래는 몸부림칠수록 더욱 얽힐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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