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무렵부터 아버지는 생선 장사를 접고 소 장사로 업종을 바꾸셨다. 밑천이야 많이 들어도 이문은 훨씬 낫다는 이웃집 아저씨의 꼬드김에 아버님은 넘어가셨다. 그때만 해도 화물열차가 많았다. 옥천 근처 이원 우시장에서 댓 마리의 소를 사 오산역으로 부치면 다음 날이면 도착했다. 그걸 받아 우리 집 외양간에서 너더댓 달쯤 먹여 고개 너머 안성장에 내다 팔았다. 그러던 정월 대보름날, 아버지는 훤칠한 키의 젊은 색시까지 데리고 오셨다. 어머니의 눈치가 예사롭지는 않았지만, 금방 오해가 풀렸다.

“필재 아재 짝으로 데려왔어.”

필재 아재는 우리 집 사랑채에서 소죽을 쑤는 코가 유난히 큰 노총각이었다. 촌수로 따진다면 필자에게는 할아버지뻘이지만 ‘헬로’라고 놀려도 오히려 필자를 ‘도련님’이라면서 깍듯이 대하며 조금도 노염을 타지 않았다. 가던 장날이라고 마침 보름날이라서 오자마자 소매를 걷어붙인 색시는 부엌에서 어머님을 도와 온갖 나물을 무쳤다. 아버지는 여름 내내 정성 들여 꾸몄던 텃밭 끄트머리의 별채를 필재 아재 내외가 한적하게 신방으로 쓰도록 아낌없이 내주셨다. 어머니도 아궁이에 군불을 잔뜩 지피고 한나절 내내 두툼한 비료 포대를 붙인 장판에 콩기름을 입히느라 이마에서 구슬땀을 쏟았다.

정월 대보름이 되면 우리는 일찌감치 아침을 먹고 운암뜰 벌판으로 나가 줄에 유릿가루를 잔뜩 입힌 액막이 연으로 연싸움을 했다. 마등산 마루에 보름달이 휘영청 떠오르면 마치 단숨에 커다란 달을 태울 기세로 논두렁길을 내달리며 불 깡통을 돌렸다. 그런 우리를 위해서 필재 아재는 미군 부대 앞에서 통조림 깡통까지 미리 주워왔다. 저녁나절 또래의 동네 친구들이 우리 집 사랑채 앞으로 슬금슬금 모여들었다. 그런데, 깡통은 줄 생각도 않는다. 왕겨를 잔뜩 밀어 넣고 풍구를 돌리던 필재 아재가 부지깽이로 왕겨 더미를 잽싸게 탁 쳤다. 시커먼 쥐가 하얀 배를 내밀고 발랑 엎어졌다. 요즘처럼 작은 생쥐가 아닌 엄청나게 큰 쥐다. 생솔가지 몇 가지를 아궁이에 쑤셔 넣으니 금세 소복하게 환한 숯불이 빛을 발한다. 

“도련님! 이것 맛 좀 보고 가.”

필재 아재는 잘 익은 쥐의 뒷다리 살점을 발라 왕소금까지 살짝 찍어 필자의 입에 넣어주었다. 온종일 오곡밥에 나물만 먹었던 참이다. 보름날에 먹는 밥은 푸짐하지만, 나물뿐이라서 금세 출출해진다. 필재 아재는 연거푸 왕겨 속으로 들락거리는 쥐를 때려잡았고, 곁에서 입맛을 다시는 친구들에게도 골고루 한 점씩 떼어 먹여주었다. 물론 집에 가서 이 고기를 먹었다는 얘기는 하늘이 두 쪽 나는 한이 있더라도 비밀을 지키기로 굳게 맹세한 터였다.

불장난이 심하면 오줌을 싼다는 옛말도 틀림없었다. 신나게 불 깡통을 돌렸던 그 날 밤에는 꿈속에서 되레 불덩이에 쫓기다가 이불에 세계지도를 푸짐하게 그렸다. 단박에 눈치채신 어머니께서는 필자의 머리에 키를 둘러씌우더니 양푼을 손에 들려주시며 부뜰네 집에 가서 소금을 얻어오라는 엄명을 내렸다. 명색이 다 큰 초등학생인데, 체면도 있고 해서 세 살 터울의 여동생을 앞장세웠다. 부뜰네 집 부엌 앞에서 대역죄라도 지은 것처럼 고개를 푹 숙였더니,

“에구! 불장난하더니 기어코 쌌구나.”

부뜰이 엄마는 부뚜막에 있던 굵은 소금을 양푼에 쏟자마자 부지깽이로 아재가 쥐를 잡듯 뒤집어쓴 키를 느닷없이 탁탁 치시며 호되게 다그쳤다. 어렵사리 소금을 얻어왔더니, 어머니는 사랑채 옆 외양간 구유에 소죽을 푸고 계셨다. 필자의 얼굴은 쳐다보지도 않고 양푼에 든 소금을 빼앗아 여물 위에 휙휙 뿌리셨다. 짠 소금까지 덤으로 먹은 황소는 한 양동이 맹물도 덤으로 들이켜 배가 터질 듯 빵빵해졌다. 오늘은 안성장날이다. 이미 감을 잡았는지 큰 눈망울을 끔벅거리며 다 큰 황소가 맨바닥에 오줌을 질질 싼다. 색시가 쪄온 고구마를 입에 잔뜩 넣고 오물거리던 필재 아재가 ‘너도 이젠 끝장이구나’라면서 혀끝을 쯧쯧 찼다.

저작권자 © 일간경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