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나무를 뽑자 많은 양의 물이 솟구쳐 군사들은 용기백배

부모산은 청주의 강서동에 위치한 해발 232m의 작은 산이다. 본래 이산은 아양산, 악양산 등으로 불리웠다.
 
임진왜란 때 화천당(華遷堂) 박춘무(朴春茂)가 복대에서 의병을 일으켜 청주성을 탈환하고 아양산마저 탈환하여 그 곳에 머물고 있었다. 번번이 화천당에게 패한 왜장은 군사로 아양산을 포위하고 식량 보급을 차단했다. 

더욱이 아양산에는 물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왜장은 포위를 굳게 해서 식량과 물의 공급을 완전히 막았다. 

화천당이 이끄는 의병은 굳게 단결하여 항전하였으나 시간이 갈수록 식량과 물이 부족하여 큰 어려움을 겪었다. 보름을 넘기자 아사자(餓死者)가 속출했다. 화천당도 기진하여 산기슭 큰 소나무 밑에 쓰러지고 말았다. 

한동안 의식이 희미해져 가는 중에 지팡이를 짚은 백발 노인이 나타나 화천당을 독려하여 일어나라고 소리쳤다. 그리고 화천당 머리맡에 있는 소나무를 가리켰다. 

화천당이 깜짝 놀라 일어나 보니 군사들이 눈물을 흘리며 주위에 모여 들었다. 화천당은 군사들에게 머리맡에 있는 소나무를 뽑게 했다. 소나무가 채 뽑히기도 전에 그 자리에서 많은 양의 물이 솟구쳐 나왔다. 수량이 많아 식수는 물론 말을 목욕까지 시킬 정도였다. 

군사들은 용기백배하여 항전했고, 산중에 많은 수량의 수맥이 발견된 것을 알게 된 왜병은 포위를 풀고 북쪽으로 빠져나갔다.

 왜병이 물러가자 화천당은 목타 죽어가는 병사들에게 물을 내린 것은 마치 굶어 죽어가는 어린아이를 돌보고 음식을 주는 어버이의 은혜와 같다고 하여 제단을 모으고 산신에게 제사를 올렸다. 

이때부터 아양산을 부모산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화천당이 죽음 직전에 계시를 받아 판 우물을 '모유정'(母乳井)이라 불렀다. 부모산 중턱쯤에 연화사(蓮華寺)라는 절이 있는데, 절 뒤쪽 산 모퉁이를 돌아가면 모유정'(母乳井) 또는'영천'(靈泉)이 있는데 지금은 말라버렸다. 

 한편  고려 말기 천석골에 서씨(徐氏)라는 부자가 살았는데 그의 재산은 놀랍게도 깨를 천석이나 뿌릴 수 있을 정도로 많았다. 그리하여 근처 마을 사람들은 흔히 서씨를 가리켜 '서천석'(徐千石)이라 불렀다. 그러나 서씨는 그 많은 농토를 관리하는 것이 귀찮았고, 따라서 늘 피로함을 느끼고 있었다. 

날이면 날마다 들과 밭 그리고 논으로 나가 씨앗을 뿌리고 김을 매고 거름을 주고 물을 대는 일이 되풀이되자 농사에 흥미가 없어진 것이다. 그는 마침내 편히 앉아 먹는 방법이 없을까 생각하고 편한 생활을 희구하게 되었다. 

서천석은 온종일 뒷산 우마고개[牛馬峙]에 올라가 넓디넓은 자기 소유의 전답을 바라보며 일하지 않고 편하게 앉아 먹고 살 궁리를 하는 것으로 매일매일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노승 한 분이 찾아 들어 시주를 청하였다. 그러자 서천석은 시주는 하지 않고 도승이거든 술수를 써서 일하지 않고 편하게 살도록 해 달라고 부탁을 했다.

 그러자 노승은 자기가 도승은 아니나 그만한 부탁은 들어줄 수 있다고 하며 사흘 뒤에 다시 찾아올 터이니 장정 서른 명만 모아 놓으라고 하였다. 서천석은 반신반의하면서도 편하게 살도록 해 준다는 말에 혹하여 근동 마을 장정 서른 명을 놉을 얻어 구해 놓았다.

이윽고 약속된 날이 되자 어김없이 노승이 나타났다. 노승은 서른 명의 장정을 데리고 우마고개에 올라가 마소허리[馬牛腰] 에 해당하는 산의 허리 부분을 끊어 길을 내었다. 한참 산을 끊는 작업이 진행되고 있는데 우연히 그 곳을 지나던 풍수(風水)가 잠시 지형을 살피고 나서 자못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노승을 조용히 불러 물었다. "이 산은 우마혈이어서 항상 재물을 등에 가득 실은 우마가 밑에 있는 서천석 집으로 들어가는 형세인데 어찌 그 말의 허리를 끊어 재물이 들어가지 못하도록 하려 하느냐?" 그러자 스님은 서천석이 자청한 일이니 어찌할 수 없다고 대답하였다. 

풍수는 아무리 생각해도 무엇인가 이유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서천석을 직접 만나보기로 했다. 그리하여 마을로 들어가 서천석을 직접 만나보고 난 풍수는 다시 노승에게로 찾아와 "내가 그를 스님 손에서 구해볼 생각으로 만나 보았는데 역시 운이 다한 것을 알았으니 스님 마음대로 하라."고 했다. 스님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자기도 서천석의 운이 다한 것을 알기에 우마혈을 끊는 것이라 하고, 다음날 산 능선을 완전히 끊어 길을 내고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 후부터 서천석의 가세가 기울기 시작하여 3년을 넘기지 못하고 영락해 버리고 말았다. 이는 재물이 있다고 해서 교만한 행동을 한 자에 대한 멸망을 뜻하는 것이었다. 이로부터 서천석이 살던 마을을 천석꾼이 살던 곳이라 하여 '천석골'이라 부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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