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말의 충신으로 알려진 최영 장군은 1316년 최원직의 아들로 태어났다.

왜구와 홍건적의 침입을 격퇴하면서 조야의 신망을 얻은 최영 장군은 벼슬이 사문인,대호군,서북면 병마부사,등을 거쳐 1388년 요동정벌을 단행하면서 팔도도통사에 이르게 된다. 또한 도형벽상공신,정란공신,안사공신에 봉해지기도 한다.

최영과 함께 고려말을 풍미했던 명장 이방실,안우,정세운,김득배 등이 김용의 모함으로 억울하게 죽자 김용의 음모를 밝혀내어 김용을 처단하기도 한다.

신진세력인 이성계와도 연대하여 고려말 내우외환으로부터 고려를 지키는 간성으로 나라사람의 추앙을 받았다.

 73세의 일기로 개성에서 참수(斬首)된 최영(崔瑩, 1316~1388)은 무속에서 장군신으로 섬기는 실제 역사적 인물 중 하나이다.

최영은 무장으로서 수많은 왜구의 침입을 격퇴하고 간신의 발호를 징치한 인물로서, 그의 행적은 '고려사' 열전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같은 최영장군의 실제 행적과는 다른 설화가 세간에 전승되는데, 인천광역시 강화군과 강원도 영월군에서 채록된 것이 있다. 강화도 자료는 최영장군을 신으로 모시는 무녀 송분임이 구연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최영장군은 딸이 하나 있었는데 그녀에게는 사랑하는 남자가 있었다. 그런데 최영장군은 자신이 직접 시험하여 자기만한 재능이 있는 사람을 사윗감으로 고르려고 하였다. 그래서 그 젊은이를 불러서 먼저 자기의 재주를 보여주었다. 즉, 최영장군이 목을 자르고 난 뒤 그 목이 다시 붙어 소생하는 재능이었다.

딸은 아버지가 다시 살아나면 자신의 혼인이 성사되지 않을 것으로 판단하고 떨어진 목에 매운 재를 뿌려 아버지의 목이 다시 붙지 못하게 했다는 것이다. 이 설화는 대적 퇴치설화에서 전이된 것으로 보이는데, 최영장군의 신이한 능력을 강조하는 의미와 억울한 최후를 드러내는 의미가 있다.

최영은 문하시중으로 있던 고려 우왕 14년(1388)에 명나라 땅 요동(遼東, 현재의 랴오둥 반도. 압록강 선양 일대를 말함) 정벌 때 팔도도통사(八道都統使)가 되어 좌군과 우군도통사에 각각 조민수(曹敏修, ?~1390), 이성계(李成桂, 1335~1408)를 두고 3월에 개성을 출발해 평양에 도착한다. 

평양에서 최영은 왕의 만류로 출정하지 못하고 왕과 함께 개성으로 돌아오는 대신 조민수와 이성계로 하여금 요동으로 출정케 한다.

이성계는 조민수를 꾀어 요동 진군을 포기하고 5월에 개경으로 역진격한다. 

최영은 6월에 남은 군사로 대적했으나 역부족으로 패한다. 곧바로 체포되어 경기도 고양으로 귀양을 가서 같은 달 합포로 갔다가 7월에 충주, 다시 12월에 개경으로 옮겨져 참수된다.

고려의 충신으로 큰 공로를 이룩했으나 직속 부하에게 배신을 당하고 참수까지 당하게 되는 억울한 생이 부각되어 한국의 무속에서는 그를 장군신으로 좌정시킨다.

 최영 장군은 임경업(林慶業, 1594~1646) 장군 및 남이(南怡, 1441~1468)장군과 함께 한국의 주요 장군신으로 모셔지지만 이 가운데 최영 장군이 가장 널리, 열렬히 숭앙되고 있다.

무속적 세계관에서 억울하게 죽은 영혼은 저승세계에 안착하지 못하고 구중을 떠도는 것으로 나타난다. 무속은 이들 영혼을 달래고 천도하는 굿을 통해 해결한다. 

그중 억울하게 죽은 왕이나 장군 및 유명한 공인 등은 무속의 신적 세계관에서 신격으로 추대되고 숭상의 대상이 된다.

최영의 활동 범위는 전국에 걸쳐 있기 때문에 관련 사당과 유적지가 산재해 있다. 관련 유적을 살펴 보면 다음과 같다. 

개성 덕물산의 최영장군사(崔瑩將軍祠), 강원도 철원군과 홍성군의 최영 장군 생가, 홍성문화제의 최영 장군 영신제, 경기도 고양시 대자산 기슭의 최영장군묘, 경남 통영시의 최영장군사당, 제주도 추자면의 최영장군사당, 부산 수영구의 무민사(武愍祠), 부산 동구의 무민공 최영장군사당, 경남 남해시 미조면의 최영장군사당 무민사, 충북 충주시의 기봉영당,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의 최영장군당 등이다.

유적은 전국적으로 분포되어 있으나 최영 장군 신격의 숭상은 특히 중부 지역이 강세를 보인다.

 최영이 탄생하고 입적한 곳이 중부 지역이어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신관 분포를 볼 때 중부 지역이 강세로 나타난다. 개성의 덕물산에 있는 최영장군사는 조선조 초에 이루어진 최영의 신원회복으로 창건되고 활성화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무민(武愍)’은 그때 받은 시호이다.

최영의 신격 숭상 영향은 한양과 주변의 경기 지역에 두루 미쳐 최영장군신의 보편화를 가속화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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