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성 700여 년이 지났는데도 남아 있는 몽골군의 잔인상

설악산은 산세와 풍광이 가장 빼어난 산이라 해도 이의를 달 사람이 없을 만큼 아름다운 산이다. 

한계령에서 서북릉을 거쳐 공룡릉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을 큰 축으로 중청에서 귀때기청봉을 거쳐 안산으로 이어지는 서북릉, 대청봉에서 권금성이나 송암산으로 이어지는 화채릉, 마등령에서 미시령으로 이어지는‘북주릉’등 힘차면서도 경관 빼어난 능선을 동서남북으로 뻗고 있다. 

여기에 천화대 암릉, 칠형제봉, 용아릉 등 곁가지 친 수많은 암릉이 산을 더욱 아름답게 꾸며 주고 있는 것이다.

설악은 단지 이러한 아름다움만 지니고 있는 산이 아니었다. 사람을 살리는 산이기도 했다. 고려시대 민초들은 서북릉 서쪽에 안산(鞍山,430m) 남쪽 성골 일원의 험난한 바위능선과 암벽을 인위적인 성과 연결해 산성을 구축하고 몽골군의 침입을 막아냈다.
성문은 문구 너비가 157~166㎝이고 측벽의 높이가 230㎝인 사각문형식이다. 성벽의 기초는 쐐기돌로 수평을 맞추듯 작은 돌조각을 사용한 수법이어서 삼국시대부터의 전통적 방법에 속하지만, 성벽의 윗부분은 여러 차례 수축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지금 성벽이 남은 곳은 높이 5~6m나 되나, 천연의 절벽은 성벽을 쌓지 않고 암벽을 이용하였다. 성벽은 아래쪽은 큰 돌을 사용하고, 위로 오르며 작은 돌을 사용하였으며, 아래에서 2m쯤까지는 벽면이 거의 수직을 이루다가 위로 오르면서 85° 정도의 기울기가 된다.

한계산성에는 전설 같은 얘기도 많다.

 신라 경순왕 때 고려와 후백제군이 대치해 혈전을 벌였고, 경순왕이 성 안의 망경대에서 망해 가는 신라를 바라보면서 눈물을 흘렸다는 이야기다. 

사실적인 기록도 전해진다. '고려사'‘조휘열전’에는 고종 46년(1259) 몽골군과 조휘(趙暉)가 이끄는 반란군이 이 성을 공격했으나, 산성방호별감 안홍민(安弘敏)이 야별초를 거느리고 출격해 무찔렀다는 기록이 있다. 한계산성은 1973년 강원도기념물 제22호로 지정되었다.

옛날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들이 목욕하는 곳이었다는 전설이 전하는 옥녀탕(玉女湯)은 한때 설악산 최고의 관광명소 중 하나였으나 1994년 탐방로 폐쇄 이후 스쳐지나가는 곳이 되고 말았고, 그로 인해 계곡 길은 거의 사라진 상태였다.

 단지 산성 발굴팀과 보수팀들이 답사와 공사를 위해 다닌 길만 희미하게 남아 있을 뿐이었다.

한계산성은 1990년대 초 이후 다섯 차례에 걸쳐 복원 및 보수 공사를 해왔다. 특히 2006년 설악산 일원을 강타한 집중폭우 때는 남문에 흙이 가득 찼고 붕괴된 성도 여러 곳이었다. 이후 보수를 여러 차례했지만 작은 자연재해에도 견디지 못하고 있다.

“돈 받고 일하는 인부가 만든 성과 살아야 한다는 절박함에서 만들어진 성이 같을 수 있겠어요? 축성 이후 700여 년이 지났는데도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을 보면 당시 몽골군이 얼마나 흉악스러웠는지 짐작할 수 있다.”

험난한 바위 능선을 올려친 뒤 돌탑 세 기가 나란히 세워진 능선마루에 올라섰다. 천제단(天祭檀)이다. 안전을 기원하는 성소(聖所)이기도 하지만, 산아래 적들의 침입을 감시하는 망대 역할도 한 곳이다.”고 했다.

대궐터에서 가파른 사면을 올려치자 또다시 망루 같은 암릉 위에 올라선다. 안산 일원은 물론, 이제 귀때기청봉으로 이어지는 서북릉과 그 오른쪽으로 한계령 뒤쪽 망대암산 일원까지도 바라보였다.
 이 암릉을 타고 오른쪽 장수대 방향으로 계속 내려서면 동문이 나온다. 동문을 빠져나가면 장수대로 내려설 수 있지만 너무 험해 일반인들의 답사는 어려움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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