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는 무학의 말대로 한양땅에 도읍지를 정해 500년을 연존

조선의 도읍지를 서울로 정한 조선태조 王師 무학은 대병면에서 출생한 실존인물로서, 성은 박씨요, 이름은 자초이고 호는 무학이다. 

출생지는 삼기군으로 지금의 대병면이며, 아버지 박인일과 어머니 공성채씨 사이에서 고려 충숙왕 14년(서기1327년)에 출생하여 조선 태종 5년(서기 1405년), 79세 되던 해 타계하였다. 

'오사설림초기' 에 의하면 이성계가 왕에 등극하기전, 어느날 꿈을 꾸었는데, 그꿈에 넘어지는 집에서 재목인 서까래 세개를 등에 걸머지고 나오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다음날 사냥을 하러 갔는데 우연히 산중에서 수도하고 있는 무학을 만나서 이런저런 이야기끝에 이성계가 간밤에 꾼 꿈이야기를 하니 무학이 해몽하기를 장차 왕위에 오를 꿈이라고 하면서 절대로 다른 사람에게 발설하지 말 것을 부탁했다.

 그 일이 있은지 얼마되지 않아, 이성계는 무학대사의 말대로 왕이 되었다고 한다. (꿈을 해몽해 보면 3개는 석삼자(三)이고, 그것을 등에 짊어졌으니 이것이 임금왕(王)자가 된 것이다). 무학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재주가 많았며, 대병면의 여러전설로 보아 어린시절에는 효행도 바른 분이었다. 

태조 등극 후, 세 관찰사를 보내 무학대사를 찾아와서 태조를 크게 도왔다. 무학이 한양에 도읍지를 정하하고 하였으나 정도전이 반대하였으나 테조는 무학의 말대로 한양땅에 도읍지를 정한 것이다. 

무학이 설명하기를 한양땅에 도읍을 정하면 500년을 연존할 것이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200년을 넘기지 못할 것이라 했다. '산수비기' 에 의하면 신라의 의상대사가 중의 말을 듣고 도읍을 정하면 오래갈 것이고 정씨성을 가진 사람의 말을 들으면 5代를 지내지 못하고 화가 생겨 200년을 못 넘길것이라고 했다. 중이란 무학을 두고 한 말이요, 정씨란 정도전을 두고 한 것이다.

이처럼 무학은 이태조를 도와 왕사로서 공이 많았으며, '무학연대록','무학전'등 많은 기록도 남겼다. 이렇게 역사상 많은 업적을 남긴 무학대사가 우리고장 합천 대병면에서 배출되었다는 사실은 자랑할 만한 일이다.

엣날 무학대사가 간월도에 머물렀다고 한다. 당시 무학대사는 지리가 밝은 인물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부석면에 사는 유씨가 그 말을 듣고 무학대사를 찾아가 묫자리를 잡아 달라고 하였다.

 그러자 무학대사는 다음날에 오면 함께 가서 잡아 주겠다고 하였다. 유씨가 길을 나서려는데 그날 따라 비가 오기 시작했다. 빗줄기가 마치 수숫대 같이 굵게 퍼부어 무학대사를 찾아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유씨는 무학대사를 찾아가는 것을 잠시 미루었다.

다음날 비가 그치자 유씨는 서둘러 무학대사를 찾아갔다. 그리고는,

“어제는 비가 너무 많이 와서 못 왔습니다. 오늘 가시지요?”

라고 하였다. 무학대사는 유씨의 말을 듣고 길을 나섰다. 그리고 어느 만큼 가다가 짚고 가던 지팡이로 가리키며,

“저기 저만큼 나 이르는 대로 묘를 써라. 나는 갈 것 없다.”

고 하였다. 대사는 지팡이로 위치를 알려 준 뒤 바로 돌아서서 가버렸다.

유씨는 대사가 알려 준 자리에 조상의 묘를 섰다. 그러나 묘를 쓴 뒤에 가세가 기울어 망하고 말았다. 묘에 세워 놓은 비석이나 상석 또한 모두 쓰러지는 등 못쓰게 되었다. 

이러한 모습을 본 사람들은 유씨가 성의가 없어서 그렇게 되었다고 하였다. 비가 오더라도 대사가 일러 준 날에 찾아갔으면 그와 같은 몰락의 비운에 처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한다.

한때 무학대사가 간월도의 절에 머물며 생활하였다. 이 절의 한쪽에 커다란 떡갈나무가 있었다. 하루는 대사가 절을 떠나면서 시중드는 이에게,

“나는 여기에서 떠나련다. 만일 이 나무가 죽거든 내가 죽은 줄 알고, 나무의 잎이 다시 나오면 내가 산 줄 알아라.”

라고 하였다. 이러한 말을 남기고 떠난 뒤 나무가 죽고 말았다. 그래서 절에 머물던 사람들은 대사가 죽은 것을 알았다.

세월이 흘러 절터에 한양 조씨가 조상의 묘를 썼다. 이곳이 명당으로 알려져 있어 조상 묘를 쓴 것이다. 그런데 집안에 우환이 있자 파묘하기에 이르렀다. 한양 조씨가 묘를 파니 안에서 화기(火氣)가 충천하였고 시신 또한 화기에 싸여 꽃이 피었다고 한다. 그 뒤 다시 서부 안씨가 같은 자리에 조상의 묘를 썼다.

이 무렵 죽었던 떡갈나무에 새 잎이 나기 시작하였다. 그것을 본 사람들은 무학대사가 환생한 조짐이라고 하였다. 이 소식이 관할 관청에 알려지자 관에서는 옛 절터에 무학대사를 기리는 사찰을 세우기로 하였다. 그래서 서부 안씨에게 넉넉하게 보상하여 파묘하도록 하고 그 자리에 무당사란 절을 지었다고 한다.

저작권자 © 일간경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