白松이 부르는 노래 양성수 검버섯 핀 희끗 백발 세월에 돋아 난 비늘의 날개옷 옥죄었던 세상 홀홀 벗어던지고 날자 날자 자유로운 날갯짓으로 소나무여, 소나무여, 나의 소나무여!
현장 수업 1 양성수 소용돌이치는 여울에서도 금빛 모래톱의 이야기는 만들어진다
8월의 숲 유현숙 기차는 입추의 숲을 관통하네 초록 숲빛에 눈을 닦으며 바람이 쓰고 가는 초서체의 문장을 받아 읽네 청단풍나무가 끝없이 이어진 산사로 드는 길 두고 온 또 하나의 생각이 뒤따라 걷는 외지고 낯선 하늘 밑 마음은 마음으로만 만질 수 있어 천리 밖에서도 유장하게 흐르는 동류항의 서체를 읽고 떨어져 있는 사람이 가끔 뒤돌아 마음 세울까 앞서거니 뒤서거니 한 생을 다 걷고 나면 남은 것은 무엇일까 받지도 못한 주지도 못한 심장에 박힌 말(言) 한 자루 쇠한 불씨에도 후룩 재로 사라질 것만 같던 그것… 그것을 무어라 쓰고 무
잔 하상만혼자 앉아 있는 것보다 옆에 커피잔이 놓여 있으면 덜 심심하다아는 할머니 한 분은 헤이즐넛 커피를 해질녘 커피라고 한다해질녘그게 더 예뻐서사실을 알려주지 않는다모르고 사는 삶이 더 아름답다하늘에서 하얗게 내린 눈이쌓여서 어떻게 푸른 빙하를 만들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그런 것들은 세상을 신비롭게 만든다우주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알면서 왜 만들어졌는지 알 수 없는 삶을 사랑한다영원히 궁금해할 수 있는 삶내게 모든 진실이 필요한 건 아니다 하상만 2005년 '문학사상' 신인문학상을 통해 등단했다. '간장' '오늘은 두 번의 내일
바랭이 풀과 쑥 무리 전사들 -허리골 산촌시편 권 채 영가뭄 날 이른 아침 두 팔 벌린 바랭이 풀 손끝으로 이슬을 받아 동그랗게 굴려 가슴속 품안으로 갈무리하고 있다그래서 그 뿌리가 그렇게도 튼실했던 것이다뽀얀 손바닥으로 이슬을 모으는 쑥 무리그래서 깊이깊이 뿌리를 내리고 키를 쑥쑥 키워내고 있었던 것이다바랭이 풀의 비명을 들었느니이슬도 마르기 전 생모가지를 비틀고뿌리째 뽑아 씨를 말릴 모양이나어디 네 마음대로 될까보냐대를 이어 여기 터전에 뿌리내린 우리아무리 뽑고 뽑아내어 보아라쑥무리들의 푸념을 들었느니저녁노을 속에 허리를 꺾고뿌
노을 비빔밥 김선태임종을 앞둔 아버지께서쪽 창가에다 마지막 밥상을 차려 드렸다흰 뭉게구름 쌀밥 위에붉은 고추장 하늘과 달걀노른자 해를 얹어화려하게 비벼놓은 노을 비빔밥아버지는 눈으로 맛있게 드시고황홀하게 목숨을 삼키셨다자식들도 눈물을 섞어골고루 나눠 먹었다김선태 1993년 월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 '그늘의 깊이' '살구꽃이 돌아왔다' '햇살 택배'등. 문학평론집 '풍경과 성찰의 언어' '진정성의 시학' 등. 시작문학상, 송수권시문학상 등 수상. 현재 목포대 국문과 교수.
노부부 김순덕무거운 발맞추며 잉꼬부부 걸어가는 꼭 잡은 두 손이 신호등을 따라간다파란불 깜빡거려도느긋한 지팡이 손등 떠미는 빨간 신호 느린 걸음 재촉해도가는 길 함께 라서 두려움도 비켜가는노부부 진한 삶 속을뜨겁게 바라본다 잡은 손 지팡이 되어 넘어질까 보듬으며세월을 한 발 두 발 보폭을 맞춰가는 긴 세월 함께 걷는 사랑건널목 완주하네 김순덕 1993년 순수문학등단, 월간문학 시조등단. 저서 '너는 해바라기 나는 바람' 외 2권. 홍제문학상수상 등 수상.
검정 봉다리 박경남 인제약국 앞 노상에 펼쳐 놓은 상추며 호박잎이오가는 사람들 눈치 살피며 어디로 팔려갈 것인지 기대에 차 있다.새벽에 일어나 준비한 푸성귀들한 줌씩 벌려 놓은 지 한나절이 지나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다.팔린 것보다 남은 것이 더 많은데하늘엔 어둠보다 짙은 먹구름이 드리우니주인 할머니 검정 비닐 봉다리 하나 들고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용기를 내 본다.‘떨이요 떨이 한 봉지에 천원만 주세요.’ 봉지에 들어오라는 돈은 안 들어오고굵은 빗줄기만 소리 내며 울고 있다.박경남 1956년 서울출생, 아람문학 시와 수필로
고백서 이 채 민 하늘의 뜻을 심고 가꾸는 밀알 같은 사람들에게아무렇지 않게 뿌려지는 저 참혹한 죽음을 나는, 가시 박힌 손가락 마디하나를 돌보며 보고 듣고만 있다 벌 나비와흙 속의 씨앗들도 마르지 않는 피둠벙에 눈을 뜨지 못하는저 동토의 땅을 나는, 무엇하나 극복하지 못하고 앉아서 검색만 한다 쑥떡 같이 찰진 봄날 하르르 날리는 꽃잎에 취해포성과 핏물로 침몰하는 흑해의 아픈 봄을 우리는, 서늘한 대화 몇 마디로 사뿐히 건너가고 있을 뿐이다이채민 충남 논산. 2004년 '미네르바'로 등단. 시집 '까마득한 연인들' '오답으로 출렁이
무등산을 그리며 나숙자 잊고 살았다 그를너무 긴 시간을 그를 보지 못했다그의 가슴은 넓고도 편안했다그러나 그의 품속으로 난 길은언제나 닫혀있고 힘들었다비석대는 얼굴도 볼 수 없고멀리서 바라보는 마음은 외길이다청청한 날 그는이슬로 세수하고 찾아오는 길손을온몸으로 반긴다고 바람이 전한다옛날 같지 않다고 한번 와 보라고포근히 감싸주는 그의 품이넓고 따뜻해 금남로로 충장로로쭉쭉 뻗은 길이라 외길이 아니라고1980년대 와는 다르다고누누이 말한다 바람이 나숙자 전남 나주 출생. 1992년 등단. 한국여성문학, 국제펜한국본부이사, 한국문인협회·
실향민 김명석고향 하면시냇물 소리가 수면을 뜯으며 연주되고산기슭의 풀 내와 익어가는 밭 내가 어우러진 내음이 풍기고아침이면 맑은 햇살이 잠을 깨우고밤이면 쏟아지는 별빛과 환한 달빛이 꿈꾸게 하고사계의 붓끝으로 자연이 섬세하게 그려지는 정경이연상되어야 하는데내 고향은고향이라고 하기 무색하게차 소리와 소음이 리듬을 깨뜨리고매연과 악취가 공기를 썩히고허공을 허문 고층 아파트와 마천루가 빛을 삼켜삭막하다그래서 나는어릴 적 큰 둥근 달이 기와지붕에 내려앉는 산7번지나소싯적 허름한 기와집에 햇볕이 내리쬐는 아현동 골목 동네나초등학교 시절 겨울
공용터미널 뒤 나기철버스에서 내려문밖으로 나오는데벽 앞복숭아 몇 개 놓고앉아 있는 아낙네오른손 머리 위에 얹고왼손책을 들어 보고 있다 나기철 1953년 서울 출생. 열두 살 때인 1964년부터 제주에서 살고 있음. 1987년 '시문학' ‘작은詩앗 채송화’로 등단. 시집 '섬들의 오랜 꿈' '남양여인숙' '뭉게구름을 뭉개고' '올레 끝' '지금도 낭낭히', 신성여자고등학교 국어 교사 퇴직. 풀꽃문학상, 서정시학상 등 수상. 제주철학 사랑방 회장, 인송문학촌 토문재 운영위원.
대합실에서 이다빈 이른 아침어디론가 떠나는 사람들이서두르지 않는다버스가 오지 않으면 가지 못하는 길서두를 필요가 없기 때문이지삶의 마지막 시간에도우리는 이 대합실에이렇게 모여 있겠지다음 목적지에서는어떤 일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 채시간이 왔다수많은 플랫폼에서다음 생으로 향하는 버스가 출발한다이다빈 시집 '문 하나 열면'(2016), 동화집 '모자선생님' (2005), 산문집 '잃어버린 것들' (2020), 에세이집 '길 위의 예술가들'(2018), '말하지 않는 아이들의 속마음' (2019), '소소여행'(2019), '작가, 여
혜윰, 지우다 김민재 나무의 사계절이 비치된 영통도서관에 가면 그때그때 바뀌는 풍경 속아무리 불러도 듣지 못하는 이름이 있다소란스런 발소리 거리에서 멀어진 지 오래, 밤은 근엄하게 온다지 갈라진 바람을 끌어 모으듯 맹렬하게 달려온 알코올 젖은 자동차에 7월의 횡단보도 빗금 지운 칸나는 붉게 울었다오늘의 날씨, 회오리오후를 갈라 기억을 꺼내놓고 우울이 안개처럼 어슬렁거릴 때 사방팔방으로 튀는 혜윰 봉지 속 씨앗들 밀봉하고 오랜 시간 몸에 가둔 뜨거운 물집 터트린다 당신의 지구 끝은 내 꿈속인지라 나는 다른 생의 모퉁이를 돌아 자꾸 나
토문재의 앞바다 장인무 바다에는 작은 섬들이 푸른 꽃처럼 둥 둥 떠 있다 새벽안개가 하얀 거품 바다를 번쩍 안아다가 황토집 앞마당에 내려놓는다 젖빛 안개가 걷히고 기와지붕에 햇살이 기웃거리면 뒷산에 청솔바람이 문고리를 흔든다 서간에 묶고 있던 문장들이 걸어 나와 툇마루에 걸터앉아 넋두리를 풀어 놓는다 청마늘향기가 코를 찔러서 한 잠을 못 잤다는 둥 휘영청 달이 너무 밝아 잠을 설쳤다는 둥 사근사근 문풍지소리에 반쯤 앉아서 샜다는 둥 노을을 지피던 바다가 은빛 비늘을 반짝이고 뱃머리에 바닷새들이 해초 숲으로 몸을 눕힐 쯤 처마 밑에
고요한 세계-김경철을 기리며 유국환 들을 수 없어도 나는 보았지요꺼칠한 손으로 애교머리를 쓸어내리는 여동생의 꿈을 말할 수 없어도 나에게도 꿈이 있었지요기와를 굽더라도 어무이 배곯지 않게 하겠다고갸가 어릴 때 경기가 왔는디나가 뭘 모릉께 마이싱을 많이 맞아 부럿제그 이후로 귀가 먹어버렸어사람들이 유행가에 어깨를 들썩이는 날이었지요강물은 흘러갑니다 제3 한강교 밑을당신과 나의 꿈을 안고서 흘러만 갑니다너 데모했지, 연락병이지?어디서 벙어리 흉내 내?손사래질 위로 햇살보다 몽둥이가 먼저 쏟아졌습니다까마득한 곳에서 어무이 말소리가 들렸지
횡단보도에는 개들이 있다 김민재 횡단보도에서 끼어든 자동차가 빨간 신호등으로 뛰어든다 뭉개진 직선들한 번도 넘긴 적 없는 페이지에서 선글라스는 탈출구를 찾는다 부유하는 색깔들, 거짓말을 하는 눈동자 오늘의 날씨는 구름을 모으고 빨간 신호등은 푸른 동그라미로 무너진다 도로를 따라 길어진 그림자 어두워지는 도로 위로 목줄 풀린 개 한 마리 횡단보도를 가로 지른다 사방으로 튀는 말은 붉은 립스틱을 찍어 바르고 신호등은 멈칫, 오늘의 안부를 묻는다 김민재 전북 고창 출생. 2004년 시집 '꿈꾸는 불'로 작품 활동 시작. 시집 '꿈꾸는 불
네 눈 속의 벚나무 양소은고양이는 죽을 때 태어난 곳을 찾아간다지저음의 냄새를 좇아침묵으로 가득한 동공을 열고떠나왔던 길들의 검은 입구로 들어간다지나는 철새의 피가 흐르는숲으로 가고 있다계절마다 그림자들을 지우며 가득 채우고얼굴에 달이 떴다 진다한 열흘, 꽃이 피던몸속 톱날이 박히고잘린 가지마다뒷모습에도 소리가 있다움켜쥐어 놓지 못하는버찌가 물들고 검푸른 속울음담장을 사이에 둔어미와 새끼의 대답이 골목을 흔들면벚나무 가지에서 꽃잎이 쏟아지고 흩어졌다지하 계단을 내려온고양이의 느린 걸음 속숲으로 뿌리를 뻗는 달빛이 가만히 내려앉는다층
내 누이 송방순 배롱나무 잎사귀 불그스레 변하더니몇 송아리 남은 연분홍 꽃이 더 진해졌다엄마 찾는 동생 업고 나간 어린 누이는논두렁에 빠져 무릎이 까졌어도업은 아기 다쳤을까 눈이 벌겋다텃밭에 고구마 두 개 캐서엄마인 양 씻어 아기 손에 쥐여주고툇마루에 앉으면 등짝은 지릿하게 젖어있다싸리문에 핀 벌개미취 꺾어 소주병에 꽂아놓고달빛에 비친 자작나무 아래서엄마를 기다리며 불러주던 섬집 아기 노래벼 이삭 누렇게 익고 땡감 나무 홍시 될 즈음이면누이가 해준 윤기 나는 밥을 먹고 싶다강아지풀로 나를 간질이던 누이가 보고 싶다감꽃을 실로 꿰어
슬픔의 농도 박경옥양파 껍질을 깐다손톱을 세우고 한 겹 한 겹 벗겨 낼수록손끝이 아니라 눈두덩이 붉어진다사랑으로 다친 상처는 눈물의 둥근 갈피한 겹씩 벗겨내는 일로 기억을 지워보지만 벗겨 낼수록 슬픔은 선명해지고 겹겹이 쌓인 그리운 시간들이 껍질 밖에서 훌쩍거린다 양파 속에 감추어진 건 상처의 결이별도 마침내는 몇 겹의 눈물을 벗겨내는 일, 벗겨내도 상처는 깊고 맵다저 보이지 않는 뜨겁고 깊은 실연失戀눈물의 바깥에서 아직도 글썽이는 슬픔다시는 당신에게 돌아 갈 수 없다는 박경옥 1958년 전북 군산 출생. 2008년 계간등단